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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 싶은 학교를 만드는 방법.

언제나 나는 죽어라 (중고등)학교를 가기 싫었다.

그나마 학교를 간 이유는, 교내 커뮤니티에서 내가 만든 창작물을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이야기 하는게 즐거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의 함께한 기억 이외에는, 학교에 대해서 단 하나도 즐거운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왜 그랬냐를 생각했다. 덕분에 반대로 가고 싶은 학교를 만드는 게 무엇인지 알겠다.


과목 => 활용 순서로 지정된 목표를 역 엔지니어링해야 한다. 과목을 다 끝내면 뭔가 창작할 것이 나오는게 아니라, 창작할 것에서 과목을 역순으로 추출해야 한다.

과목이 아니라 창작이 중심이 되야 한다. 완성할 대상, 하고 싶은 창작을 정한 다음 그것에서 역순으로 필요한 과목을 배우는 커리큘럼이 필요하다.

형편없는 교육 과정은 과목 그 자체가 목적이다. 과목을 늘여놓고 “어디에 쓸진 모르겠지만” 일단 과목을 다 배우고 그것을 토대로 언젠가는 그걸 쓸일이 있을 거라고 약속한다.

하지만 그런 공허한 약속은 아무도 안 믿는다. 그걸 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구체적으로 묘사되거나, 눈으로 보이는 데모를 제시하지 않으니까.

반대로, 작곡, 공연, 영화 제작,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그림 무엇이든, 하고 싶은 창작이 분야별로 상단에 고정되고, 그것을 선택했을때 도움이 될만한 과목이 추천되는 방식이라면 학교가 그렇게 까지 싫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적절한 유머 감각이 있고, 교과서의 내용을 그대로 읊지 않는 교사도 필요하다. 그럴려면 텍스트가 아니라 역시 창작 위주가 되야 한다.

학교가 내게 의미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이미 교과서에 나와 있는 내용인데 왜 그걸 그대로 읽어주지?? 풀어 설명하는건 내가 더 잘 하는데?” 였다.

그러니까 나는 이미 지금 눈앞의 책의 텍스트를 읽는 즉시 이해했고, 그 내용을 왜 굳이 의미없이 다른 형태로 가공도 안하고 다시 읽어주지?- 그런 의문.

정말 그 시기에 엄청난 혼란을 느꼈다.

“책 뿐만 아니라, 책으로 가르치는 사람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은, 책만으로는 전달 안되는 추가 콘텐츠가 있다는 것 아닌가???”

(교과서) vs (교과서 + 교사)로 했을때 학생인 내게, 양쪽의 정보 전달력과 정보량이 차이가 없거나 전자가 더 월등하게 나은 현상이 있었던 것이다.


하여간 나중에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단 한번도 학교 수업에 집중한 적이 없다. 10년간, 수업 대부분은 그냥 집에서 만들고 싶은 비디오를 기획하고 망상하는데 보냈다. 공부는 차라리 집에서 했다.

그런데 만약 창작이 우선되면, 텍스트를 그대로 읊는 수업이 될리가 없다. 창작은 실행과 과정에만 존재하니까.